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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by 이너피스 봄봄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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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책표지

자유롭다면 행복합니다

모든 길은 진리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이 진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은 것은 그것이 정적(靜的)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곳이 없습다.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이 살아 는 것이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에게 정말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아닌 완전한 변화, 즉 내적 혁명을 강조합니다. 그러려면 '과거는 죽어야'합니다. 어제(즉 아는 것)가 죽어야 오늘이 있고 매 순간 죽어야 매 순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시간이 가면 나도 뭔가 달라지겠지 해서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장, 즉각적이어야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과거에 있어서 죽지 못하고 있고,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완전한 변화, 내적 혁명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고 나서_1979년 봄 정현종

 

 

16가지 질문들

1.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하려는 것은 자신에 관해 알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나나 어떤 분석가 또는 철학자를 좇아서 알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자신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 관해 아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
바로 앞이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당신이 제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 때에만 당신은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자아의 범위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이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을 넘어서야만 나는 나 자신에게 온전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자신에 관해 점진적으로 자꾸 더 보태가며 조금씩 배울 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얻은 지식을 통해서 탐구하는 것입니다.

 

3. 삶의 정체성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 시간을 들일 때 당신은 모든 형태의 왜곡을 허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아란 끊임없이 온갖 억압과 긴장과 영향을 받으면서 움직이고, 살고, 싸우고, 원하고, 거부하는 복합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주의(attention)는 집중(concentration)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집중은 배제입니다. 하지만 주의는 완전히 아는 것을 뜻하며,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항상 다른 사람과 저울질하고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몸부림친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환영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4. 기쁨과 쾌락 사이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 체험, 지식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인데, 당신이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쾌락이 됩니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며, 그것에서 쾌락을 찾지 않는다면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5. 공포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정말 찾고 있는 것은 불만족이 전혀 없는 만족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에 관해 두려워합니다. 추상적인 공포란 없으며, 공포는 언제나 그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은 그 연상(聯想)들과 함께 공포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공포가 아닙니다. 생각이 시간 속에서 실제가 아닌 사실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란 언제나 낡은 것인데, 그 이유는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고 기억은 언제나 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6.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당신이 스스로를 신념, 국적, 전통에 따라 분리하고자 할 때, 그것은 폭력을 키웁니다. 따라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나라, 어떤 종교, 어떤 정당이나 편파적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은 없고 오직 영향만 있을 뿐인데, 나에게 맞지 않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을 나쁜 영향이라고 부릅니다.

 

7. 관계에 대하여
이미지들에 기초한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못한데, 왜냐하면 이미지는 허구적인 것이며 사람은 추상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관념 속에서, 이론 속에서, 상징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과 남들에 관해 만들어낸 전혀 실제가 아닌 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며, 당신은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조각냅니다. 당신은 원칙, 신념, 이상들이 불가피하게 위선적이고 부정직한 삶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압니다. '있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상이므로, 만일 당신이 '있는 것'과 더불어 있는 법을 안다면 그때는 반대되는 것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8.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만일 당신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순응, 또 다른 형태의 지배를 가져오게 될 또 하나의 반응이 될 것입니다.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지나간 어떤 것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원망(願望), 소원,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 뿐입니다. 자유를 만나려면 마음은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시간의 속박 없이, 의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자유를 향한 거대한 몸짓인 것입니다.

 

9. 시간의 초월
인간은 시간에 의해 삽니다. 시간은 우리 자신들 속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기꾼입니다. 시간이란 인간이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놓은 운동에 불과하며, 그것을 쪼개는 한 인간은 항상 갈등 속에 있게 됩니다. 당신은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대순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을 아는가?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간격입니다. 생각이란 분명히 자기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안전하려는 생각입니다. 행동은 언제나 즉각적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닙니다. 행동은 언제나 현재 속에서 가능하지만, 행동이 너무나 위험하고 불확실한 나머지,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안전함을 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생각에 순응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때 죽음은 삶과 매우 흡사합니다. 당신은 죽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적 역설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인 양 완벽하게 살려면 어제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람이 무엇인지 또는 자유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10.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는가? 증오 없이, 질투 없이, 분노 없이, 그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바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고, 비난 없이, 비교 없이, 사랑하는 것,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사랑은 책임이나 의무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그 말들이 합당한가? 당신이 무슨 일을 의무적으로 할 때 거기엔 사랑이 들어 있는가? 의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이 묶여 있는 의무의 구조는 그를 파괴합니다. 어떤 일을 의무이기 때문에 강제로 하는 한,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엔 의무도 책임도 없습니다.

 

11.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우리의 모든 관계는 사실 가공의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에 기초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당신은 나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서로의 참된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사랑이 있으며,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 순간 사랑은 사라집니다.

 

12. 내가 바라보는 것들
왜 당신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가? 만일 그 어떤 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에 대항할 수도 도피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거기엔 좋아함이나 싫어함도, 그 어떤 갈등도 없습니다. 당신이 관찰자인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기억, 체험, 사건, 영향, 전통, 여러 형태의 수많은 고통 등 과거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관찰자는 과거이자 현재이며 기다리고 있는 미래 역시 그의 일부입니다.

 

13.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관념을 행동에서 분리했는데, 왜냐하면 관념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고 행동은 언제나 현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삶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관념으로서의 과거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에 있을 때, 관찰자, 사고자, 중심, '나'가 없어지는 것을 주목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그 상태에서 생각은 시들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없는 한 과거의 것들인 기억, 체험, 지식에서 끌어낸 생각이 없는 한, 사고자가 없는 한, 당신은 자기 자신 안에서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억 상실이나 백지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14. 어제의 짐들
우리는 언제나 짐을 지고 다닙니다. 우리는 짐들에 대해 결코 무심해지지 못하며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내적 고독과 내적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고, 가고, 기능하고, 하늘을 나는 자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미덕이 자유가 있을 때에만 꽃피듯이 선(善)은 공간 속에서만 꽃 필 수 있습니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는 것이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는 것에 대해, 당신이 만든 모든 이미지와 체험들에 대해 매일 죽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 명상에 대하여
우리는 '나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 속에 불행이 있습니다. 이 끊임없는 요구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중성의 회랑(回廊)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체험은 이미 체험된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명상은 생각의 통제가 아닙니다. 명상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느껴 아는 것이며, 옳다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생각과 느낌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16. 완전한 혁명
질문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인데, 우리는 남에 의해 인정받고 확증된 생각을 갖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관념을 갖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관념, 신념, 원칙들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완전히 부정적이고, 완전히 고요하고, 생각도 없고, 두려움도 없으면서 비상하게, 정열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읽을 뒤 느낀 점

어떻게 매 순간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난 뭘 알고 있을까요?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일까요? 우리는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음에도 착각을 버리고 본질을 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으며 많은 페이지에 공감하며 줄을 그었지만 아직도 열여섯 가지의 질문들에 대해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는 척은 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은 기억이 사라지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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